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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간의 남국방문.. 필리핀 (Philippines) - 마닐라 (3/16)

다녀온곳(국외)

by dunkin 2004. 12. 14.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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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이어서 계속...






필리핀의 국민영웅 '호세 리잘'의 마지막 발자취라고 한다.

감옥에서 처형당하러 나갈때의 그 마지막 발걸음... 의연한 느낌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카메라를 들이대는 나를 보며 미국계 필리핀인 '딩'이 의아하다는 표벙을 던젼지만

바라보는 기분이 왠지 묘 한것이 꼭 담아두고 싶었다.











이사람이 '호세 리잘'


자..자..

필리핀 대학에서 조차 호세리잘의 가족 이름까지 다 외워오는 숙제를 내준다는 인물.
(형제만 열댓명이라는데 -_-;; )

'호세리잘'이란 인물에 대해 알아보자..







● 호세 리잘 ( jose rizal, 1861-1896 )

- 간략한 설명:
의사이며 과학자로 스페인에 유학.
1892년 귀국하여 ' La Liga Filipina'(필리핀 민족동맹)란 단체를 조직, 스페인 식민 당국에 민족주의적 비폭력 저항 운동을 전개함.
1896년 Andreas Bonifacio에 의해 발생한 반식민 폭동 공모 혐의로 체포되어 1896.12.30 처형됨.
처형되기 전날 'Mi Ultimo Adios' (나의 마지막 작별)란 한편의 시를 써 필리핀 민족주의를 고취함.


- 연도별:

1861년 6월 19일 라구나에 잇는 깔람바에서 태어남.
11남매중 7남, 상류층 농가 출신
1887년 NOLI MI TANGERE (DON'T TOUCH ME)라는 책을 BERLIN에서 집필함.
이책에서 필리핀현실과 스페인의 부당한 정책과 탄압정책등을 낱낱히 고발함.
EL FILIBUSTERISMO : 두 번째로 집필한 책 - 이책에서 필리핀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제시책을 내놓고 젊은이들의 의식개혁을 부르짖었다.
1872-1877 아테네오 데 마닐라 대학 수학
1877-1882 산토 토마스 대학 수학
1882-1885 스페인 유학(20-23세)
1885-1887 파리, 하이델베르크, 베를린 여행
1887(25세) 첫 소설 Noli Me Tangere' (DON'T TOUCH ME) 출판
1887 유럽 여러나라 여행
1888 홍콩, 마카오 여행, 일본, 미국, 런던을 거쳐 파리에 체류
1890-1891 브뤼셀, 마드리드 여행
1891'El Filibusterismo'를 출판함and .
1891-1892 홍콩에서 안과의사 개업함
1896 필리핀 혁명(카티푸난의 항쟁)발생
1896.12.30 06:30 산티아고 요새에서 바굼바얀의 루네따 광장으로 이송되어 07:03분에 처형됨

- 리잘의 생애와 사상

호 세 프로타쇼 리잘 메르카도(jose pritacio rizal mercado)는 1861년 6월 19일, 라구나주의 칼람바에 있는 한 작은 마을에서 프란시스코 메르카도(부)와 테오도라 알론소(모)의 2남 9녀중 7번째로 태어났다.
그 당시 호세 리잘의 아버지는 칼람바 최초의 석조가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제분소, 약국, 그리고 잡화상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교육을 잘 받은 여성으로서 그것을 뒷받침해 주듯이 그의 집 서재에는 수천권의 책이 있었다.
그는 2살때 영어의 알파벳을 모두 익혔고 세 살때는 누이들의 그림책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어느날 밤 어린 리잘은 등불 주위를 맴돌며 날아다니고 있던 나방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리잘의 어머니는 그에게, 등불이 좋아 엄마 나방의 말을 듣지 않고 등불에 가까이 갔다가 날개가 타서 죽은 어린 나방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린 리잘은 왜 어린 나방이 등불속으로 날아 들어가 타 죽었는지를 이해했다.
어린 나방처럼 그도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등불 옆에 있고 싶었다.
그에게 있어서 등불이란 곧 진실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당시 필리핀 민족이 처한 음울한 시대적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에 필리핀은 독립국가가 아닌 스페인의 식민지(1571-1898)였던 것이다.


호세 리잘의 아버지



호세 리잘의 어머니 (80세때의 사진)

호세 리잘은 나이에 비해 늦게 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의 모든 상을 휩쓸었으며 성적은 언제나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아테네오를 졸업한후 리잘은 산토 토마스 대학에 입학했다.

산토 노마스에서 의학을 전공했지만 의학 못지않게 시와 미술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이때 대학 성적은 아테네오에서의 성적에는 미치지는 못했으나 의사로서 병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의술을 베풀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게 된다.


Leonor Rivera 18세때 리잘의 약혼녀 사진 1


리잘의 서재

그 무렵 리잘은 레오노르 리베라라는 여학생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레오노르는 당시 라 콘코르디아 대학에 재학중이었다.

레오노르 역시 그에 대해 깊은 애정을 느꼈으며 그와 결혼을 약속하기까지했다.

리잘은 21세가 되었을 때 그의 형인 파시아노에게 스페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파시아노는 리잘에게 356페소를 주었으며 그 돈을 가지고 스페인으로 머나먼 유학을 떠났다.


Leonor Rivera
18세때 리잘의 약혼녀 사진 2


Leonor Rivera 18세때 리잘의 약혼녀 사진 3
후일 영국인과 결혼함.

리잘은 1882년 5월 3일 배편으로 마닐라를 떠났으며 그로부터 한 달뒤에 유럽에 도착했다.

그는 항해를 하는 동안 한번도 빼놓지 않고 여행중 방문한 나라와 그 나라 사람들에 관하여 일기를 썼다.

스페인에 도착한 그는 센트랄 데 마드리드 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계속했다.

의학외에도 독일어,영어,미술,그리고 펜싱등에도 많은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이 당시 형은 그에게 매달 50페소의 학비를 보냈다.

사실 50페소란 돈은 스페인에서 유학생활을 하기에는 어처구니없이 모자라는 액수였다.

따라서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았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교통비도 없어 집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학교까지 매일 걸어서 통학해야만했던 리잘은 한번은 영양실조에걸려 병상에 누운 적도 있었다.

리잘은 스페인 신부들과 통치자들이 필리핀인들을 무지하고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기위해 소설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소설의 제목을 '놀리메 땅헤레(나를 건드리지 마라)'로 정했다.

1884년 리잘은 그의 의학수업을 모두 마쳤다.

리잘은 안과수술 실습을 더하기위해 파리에서 다시 독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칼 울머라는 목사를 만나 그의 집에서 여름을 보내며 독일어를 공부했다.

1887년에 그의 소설을 모두 마무리 지었다.

필리핀의 젊은이들 사이에 그 소설은 널리 읽혀졌다.

이에 스페인 당국은 매우 분노했으며 그 소설을 금서로 지정하게 되었다.

필리핀에 있던 리잘의 친구들은 그에게 필리핀으로 귀국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가족을 돕기위해 그가 '자유의 땅'이라고 불렀던 유럽을 떠나 마닐라로 향하게 된다.


1882년 5월 3일. 젊은 청년, 리잘을 태운 배가 수에즈 운하를 지나고 있다.


Heidelbert University and a Duel-Scarred German Student


O-Sei Kiyo San
1888년 봄 일본에 머물 때 리잘을 사랑했던 여인.그녀는 리잘이 일본인일줄 알았다고 한다.


Susan Jacoby
벨기에 브뤼셀의 Jacobys 집에 머물렀을 때 그를 흠모했던 여인.

 
호세 리잘이 유럽에 머물 때의 사진 ( 왼쪽부터베를린(칼라), 흑백- 파리, 런던, 베를린 )

필리핀으로 돌아와 집에 머무는 동안 분주히 의학실습을 했다.

시력을 잃어가는 환자들의 눈을 수술해 주었고 칼람바 사람들은 그를 '독일에서 온 의사'라고 불렀다.

농지 임대료는 계속 인상되어 소작농인 필리핀 사람들은 허리띠를 계속 졸라매는 반면 스페인 신부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해 나갔다.

이때 그는 농부들을 선동해 인상된 농지 임대료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하기도했고 이로인해 스페인 신부들의 눈에는 목에 걸린 가시같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부들은 스페인 총독이 리잘을 감옥에 가둬두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게 된다.

리잘의 가족은 그에게 유럽으로 되돌아갈 것을 권유했고 5개월간 자신의 고향인 칼람바에 머문 그는 다시 유럽으로 떠나게 되었다.

유럽으로 가는 도중 일본, 홍콩, 그리고 미국에 들렀다.

그리고는 미국에서 3주간 머물다 영국으로 향했다.

영 국에 머무는 동안 스페인 신부들이 고국에 있는 그의 형 파시아노와 그의 4명의 매형들의 땅을 빼앗아 갔으며 수많은 필리핀인들이 스페인 당국에 반대하는 언행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고국에서 진행되는 개혁운동을 돕기위해 바르셀로나에 있던 필리핀 지식인들은 '라 솔리다리다드'라는 신문을 창간하게 되었다.

이 사업에 참여한 사람들로는 그레시아노 로페즈 제나, 마르셀로 델 피랄, 마리아노 폰스, 안토니오 루나, 리잘 그리고 블루멘트리등이 있다.

그는 필리핀 국민을 변호하는 수많은 기사와 사설을 그 신문에 실었다.

또한 스페인 정부가 필리핀 국민을 스페인 국민들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다면 필리핀 국민은 스페인 정부에 독립을 요구하는 수밖에 없다는 글을 신문에 실었다.

이때 리잘은 고국으로부터 더 가슴아픈 소식을 들었다.


체코 공화국, Litomerice에 있는 기념 동상


Litomerice의 리잘이 머물렀던 호텔



1886년 독일 베를린( Pastor Ullmer in Wilhelmsfeld, Jose-Rizal-Street 7)의 이 집에서 'Noli Me Tangere'를 집필했었다.

1887(25세)
독일의 베를린에서 첫 소설 'Noli Me Tangere' (DON'T TOUCH ME) 출판했을 당시 원본 표지



리잘이 안과를 공부했던 하이델베르그 대학교

University Eye Clinic in Heidelberg,
Bergheimer Str

1960년 필리핀 대사관에서 제작한 기념 현판
'Dr. Jose Rizal,1861-1896, national hero of the Philippines: Here, in Bergheimer Str. 20, Rizal practised ophthalmology from February to August 1886 under Professor Dr. Otto Becker, Director of the University Eye-Clinic. Embassy of the Philippines, June 19,1960'


하이델베르그의 리잘공원
Rizal-Park in Wilhelmsfeld




그 의 매형중 한 명이 사망했는데 교회가 기독교식 장례를 치르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과 그의 큰 형 파시아노를 비롯한 나머지 형제들이 필리핀 남쪽섬으로 유배되어 갔다는 것 그리고 스페인 당국은 칼람바 사람들의 집과 농토를 모두 빼앗고 그들을 외부로 몰아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슬픈 소식은 바로 그의 여자 친구였던 레오노르 리베라가 한 영국인과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원망하지는 않았으나 '영국인은 자유인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탄식을 했다.

1891년 9월 그의 두 번째 소설인 '엘 필리부스테리스모(곧 교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해있는 애국자란 뜻을 내포)'를 완성했다.

그는 이 소설을 스페인 당국에 의해 처형된 세 명의 필리핀 신부인 부르고스, 고메스 그리고 자모라 신부에게 바쳤다.

이 소설은 리잘이 처음에 집필한 '놀리 메 탕헤레'보다 더욱 과감한 개혁의 의지가 곁든 것이었다.

그는 일기에 '전쟁터는 바로 필리핀이다'고 썼다.
1891년 10월 18일 리잘은 유럽을 떠났다.

여행을 하는 도중 5개국어로 일기를 썼다.

그 당시에 11개 국어를 알고 있었던 상태였다.

그리고 여행이 길어지면서 바닥이 난 여행자금 마련을 위해 잠시 홍콩에 들르게 된다.
안과 의사로서 개업을 한 그에게 환자는 많이 찾아왔다.

그들은 그를 '스페인 의사'라고 불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는홍콩은 좋아했지만 조국에서 고통받는 필리핀 국민들을 모른척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어떠한 위험이 따르더라도 필리핀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후 필리핀에 다시 왔으나 스페인 당국은 필리핀에 입국한 이래로 그를 계속 미행했으며 체포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런와중에 그의 몇몇 친한 친구들과 '라 리가 필리피나'라는 사회단체를 결성, 연설을 통해 '라 리가 필리피나'가 필리핀국민들을 단합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러한 연설을 한지 3일후에 스페인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산티아고 요새 감옥에 투옥된다.

그리고 얼마후 잠보앙가의 다피탄이라는 외롭고 한적한 읍으로 유배되어갔다.

리 잘이 다피탄으로 유배되어 갔다는 소식은 필리핀 국민에게 커다란 분노를 안겨 주었고 특히 가난한 국민들 사이에서 이러한분노가 더 컸으며 그중에는 안드레오 보니파쇼라는 젊은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리잘의 소설과 리잘의 시를 즐겨 읽었으며 그의 친구들과 함께 '까띠푸난'이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했다.

까디푸난의 목적은 무장혁명을 통해 필리핀을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키자는 것이었다.


Nelly Bousted
1891년 리잘과 거의 결혼할뻔했던 여인


Josephine Bracken
리잘의 마지막 순간까지 곁에 있었다

1892년 7월 17일 리잘은 다피탄에 도착했다.

망명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했다.

마을에 얼마간의 돈을 기부했으며 그 돈으로 인해 마을에는 마침내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다.

다피탄에는 학교가 한 개밖에 없었다.

그래서 리잘은 자기 자신이 직접 학교를 하나 세워 직접 아이들에게 영어, 스페인어,스포츠등을 비롯해 여러 과목을 손수 가르쳤다.


아이들은 리잘의 농장에서 일을 도우며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학생들은 그를 도와 커다란 폭포가 딸린 수영장도 만든다.

아이들은 또한 가구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어른들 또한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는 또한 그곳에 진료소를 차려놓고 환자들을 돌보았다.

환자들중 어떤 부유한 사람이 리잘에게 많은 돈을 치료비로 주기도 했다.

그는 죠세핀 브락켄이라는 딸을 동행해 다피탄으로 왔는데 죠세핀과 리잘은 서로 첫 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아버지가 홍콩으로 돌아간 뒤에도 다피탄에 머물렀다.

리잘 역시도 자유를 몹시 갈망했다.

그는 스페인 총독 라몬 블랑코에게 자원의사 자격으로 쿠바로 갈 수 있게끔 허락해 달라고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7월 30일, 그는 블랑코 총독으로부터 그렇게해도 좋다는 답장을 받았다.

배를 타고 쿠바로 항해하던중 까띠푸난 혁명이 일어나 반역죄로 스페인 당국에 의해 체포되고 필리핀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나 스페인 당국은 군사재판을 통해 사형선고를 내리고만다.

1896년 12월 30일 리잘 박사는 루네따공원 (현재의 리잘공원)에서 스페인 소총분대에 의해 총살당함으로써 그의 짧았던 35세의 인생을 마감했다.

글발췌: 이것이 필리핀이다.
추 신: 반복되는 단어와 문장은 부분적으로 임의 편집했음을 알려드립니다.


1896.12.30 06:30 리잘의 공개총살 장면
산티아고 요새에서 바굼바얀의 루네따 광장으로 이송해 07:03분에 공개총살을 시키고 있는 스페인군


1897.1.11 리잘을 처형한 2주후 필리핀 독립운동가를 바굼바얀의 루네따 광장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공개총살형에 처하는 스페인군




조 각작품1: Triumph of Science Over Death - made of escayola. This was sent to Professor Ferdinand Blumentritt as a gift


조각작품2: Prometeus bound - statue made by Rizal


조각작품3: A clay statue of a wild boar, done by Rizal in Dapitan


조각작품4: Rizal's sculpture


리잘공원으로 이장전의 Dr. Rizal 묘지


Dr. Rizal의 시신이 안치된 지금의 리잘공원 기념탑


만달루용 시에 있는호세 리잘 대학교


초기 정부 공관내 Marble Hall의 리잘 기념관


산티아고 요새내의 리잘 기념관으로 호세 리잘의 모든 기록이 보관되어 있는 곳


호세 리잘 100주년 기념일(1996)을 기해 동판으로 만든 산티아고 요새내의 발자취




사진은 리잘의 시를 숨겨서 나왔던 알콜램프.


산 티아고 요새에 감금되어있을 당시 리잘이 몰래 써두었던 ' 마지막 작별 ( Mi Ultimo Adios ) '이란 이름의 시를 마지막으로 면회온 이에게 꼬깃꼬깃 접어 알콤램프에 숨겨서 밖으로 내 보내게 된다.

이때 간수에게 들켰더라면 ' 마지막 작별
( Mi Ultimo Adios ) ' 은 영원히 역사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수도




아..

이 아저씨 알고보니 장난이 아닌 아저씨구나 ^^:;;;;

2살때 알파벳을 다 외고.. 3살때 그림책을 읽고 11개국어라니 ... 인간이 아니다.
억압당하는 덜배운 자 앞에서 길을 밝혀준 필리핀의 영웅이 맞구나.

리잘 박물관 안에서 이사람이 생전에 입었던 옷이라고 걸쳐 넣은거 보니
여자 상의 55size보다 작아보여서
'뭐냐!! 난쟁이냐 !!! 동상은 이따만하게 만들어놓고 졸라 외소하네~ 영웅 이미지가 아니잖어!! ㅋ '
라면서 비웃었던 내가 부끄럽다 -_-

절로 존경이 피어난다 씨밸..












리잘 박물관에 있는 그의 마지막 시라고 한다..

영어 스페인어는 물론 한국어로도 쓰여져 있어서 남겨왔다.

읽어보고.. 느껴랏 !










흠....










산티아고 요세에 있는 감옥(?) 같은거라고 한다.
자세하게는 모르겠고 얼핏 들은 이야기로는
강이 넘치면.. 저 안에서 수장시킨다고 하던데..

그럴싸하군.. 이라고 생각하며 그덕였지만
사실인지 확인한 바 없다.. ^^;;










뭐..

흉내내기.

기념이라고 해 두자 ^^:










리잘 박물관을 둘러보던중
조그마한 대나무 숲에서...

양키새끼들이 나무마다 기념으로 뭐라 새겨놨길래..
나도 한국어로 이름 하나 남겨놓고 왔다.

사실.. 이런짓 하면 안되겠지만... 한글로 쓰인게 하나 없어서.. 오기로 ^^;;;










산티아고 요새를 둘러보고 처음 들어왔던 길로 나오는데...

그.. 축제용 마차의 장식을 하는 필리핀 아저씨들이 보여 한컷.

카메라를 들이대니 귀여운 얼굴로 씨익~ 웃는다 ㅋㅋ

한국 같았으면.. 사진기 들이대면 인상부터 쓰면서 '당신 뭔데 사진찍어!!' 하며 성질내기 바뻤을텐데

필리피노의 미소를 지을줄 아는 저 여유가 부럽다.











저~~기 끝까지 모두들 장식하느라 존나 바쁨.









정말 정성이다..

필리피노들은 어딘가 매니악 한 구석이 있나보다.










수녀님마져 ^^;;;;

모두들 즐기는 분위기. 좋아보인다 ^^

(씨밸.. 정말 부럽다고~ 이런 즐기는 분위기!! )











눈물을 흘리는 마리아(?)상.

섬뜩하기도 하고.. 슬퍼보이기도하고....










흑인인지 필리피노 인지 검은 피부의 마리아(?)상도 있었다.

지나가던 아주머니 엄청나게 반가워하며 푸짐하고 둔한 몸을 이끌고 제작중인 마차까지
힙겹게 올라가더니 Kiss를 퍼 붓더군.
뺨을 부비고 얼굴을 쓸어보고... 거의 울것같은 감동에 사로잡힌 아주머니 ^^











저 피부색..
저 디테일..

가난한 필리피노란게 믿어지지 않는구려..











어디 유명한 성당이라고 해서 찾아갔는데 (역시나 어딘지 명칭은 -_-;;;;; )
마침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더군.

남의 결혼식에 뻘줌해서 머뭇거리는데
우리의 '딩'... 신부 얼굴이 뷰티플 한지 check 해야 하러 가자며 앞으로 성큼 성큼 끌고간다 ^^;;;
어이없는 아메리칸 필리피노 ㅋㅋ










우리나라 성당 결혼식과 비슷하던데..
남자가 입고있는 저 하얀 삼베옷 같은것은 이나라 전통 의상이라고 한다.

왠 외국인 무리가 성당앞까지 우르르 몰려가니 식을 진행하던 신부님이 살짝 놀란표정으로 처다보기도 했다는 ^^;;;










아~ 사진 죽인다.

새로로 뻗은 구조물이 심리적 위축과 경건한 마음을 들게 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는데
그말이 딱 맞군.

그리고...

결국 신부 얼굴은 check 하지 못했다는 ㅠㅠ









여기저기 마닐라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이상한 천막치고 젊은애들이 단정한 복장으로 뭔가 행사를 하길래 둘러보니
무슨 결식어린이 돕기 행사 분위기의 자선 행사 같은걸 하고 있더군.
뭔가 도와줄 일이 없을까.. 싶어 둘러보다 '헤나 문신'을 하는 애가 있어서
30페소 주고 팔에 하나 그렸다.

아~ 필리핀까지 와서 이런 착한일을 하다니 !! 나란 인간은 왜이렇게 선한지 ㅋㅋ
밥 굶는 아이의 한끼 식사를 내가 도와준거야~

(사실은 헤나 문신.. 굉장히 해보고 싶었다 ㅋ )










어...어색한 포즈 ^^;;;;;





이나라 내국인을의 행사장에 나타난 왠 외국인의 팔에 문신을 그리려니...
무척이나 긴장 했었나보다.

문신을 그리는 내내 심한 수전증을 앓는 환자 마냥 손을 사시나무처럼 떨더군 ㅋㅋ

땀 흘리며 초 !! 긴장한 필리피노 학생 ㅋㅋ 귀여웠다 ㅋ


30페소 짜리 문신하고 뭔가 좋은일에 쓰는 행사라 20페소 더 줬다.

역시 난 선하다 ㅋㅋ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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