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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양양 낙산사 (2/2) - 둘째날

다녀온곳(국내)

by dunkin 2008. 8. 4.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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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이어서...






해수관음상을 보고 의상대쪽으로 가려면
아까 그 이름모를 연못을 또 지나가야 한다.

올때보다 짙어진 안개덕에 분위기가 훨씬 좋다.













보슬보슬 내리는 빗방울이 모여모여
연꽃잎 위에 청명한 모습으로 뭉처져 굴러다닌다.

정말 깨끗해보이는....












절의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는 공짜식사!!

절음식이라 비록 고기는 안들어있을지라도
먹고싶다. 꿀꺽~
하지만 11:30~ 13:30 에만 제공한다고 ㅠㅜ

저시간은.. 한창 쿨쿨 잠자고 있을시간이었다는...

혹시라도 낙산사를 찾을 계획이 있다면... 11:30~ 13:30에 맞춰서 가보길...












절 안에... 이런 박물관 스러운 시설이!!

'의상 기념관' 이란다.
의상대사의 일대기와 기록들을 전시해 놓은곳.




의상 기념관

지난 2000년 5월 착공해 1년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2001년 5월 1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개관한 의상기념관은, 동해바다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한옥 양식의 50평 규모 전시관이다.

기념관 내부에는 전통인물화가 권오창씨와 신구대 전보삼 교수가 일본 교토 고산사 소장 의상스님의 영정을 기초로 제작한 의상스님 진영과, 의상스님 저술의 핵심이랄 수 있는 ‘화엄일승법계도’와 ‘백화도량발원문’을 쓴 10폭 병풍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일연스님과 박인량이 의상스님에게 바친 찬시와 중국 화엄학의 대가 법장스님이 의상스님에게 보낸 ‘기해동서’도 제작, 전시되어 있다.

특히 전통양식을 빌린 불화 8점으로 표현한 의상 스님의 일대기는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 출생, 출가, 중국 구법행, 낙산사 창건, 화엄법회, 열반 등 8점으로 구성, 부처님의 8상록을 연상케 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이외에도 의상스님의 사상을 연구한 연구서들도 전시,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연 평균 1백만 명의 관광객이 오가는 낙산사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자료를 정리해 의상기념관이 스님의 사상과 구도정신, 그리고 호국안보 정신을 가르치는 산교육장이 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의상기념관 한구석에는
몇년전 화재로 전소되기 전의 낙산사 건물의 흔적들도
전시 해 두었더라...

곰 쓸개도 아니고...
볼때마다 속 쓰릴텐데... ^^;












관동팔경의 하나라는 그 유명한 의상대.

추적추적 비 내리는 날씨와 짙은 해무로 뒤의 바다조차 보이지 않는 의상대는
좀 초라해 보인다.

시원스래 높은 하늘! 저 뒤로 보이는 파~란 바다! 하얀 파도! 그앞의 소나무 한그루! 정자 하나 !!

이게 익숙한 의상대의 풍경인데 말이지...



의상대

의상대(義湘臺)는 의상스님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이곳에 이르러 산세를 살핀 곳이며, 의상스님의 좌선(坐禪) 수행처라고 전한다.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해안 언덕에 있다. 체조스님의 활동 년대가 18세기이므로 위의 시를 통하여 적어도 이때까지는 의상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근대 이전에 폐허가 되었던 듯하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25년에 낙산사 주지 김만옹(金晩翁)스님이 이곳에 정자를 새로 지었다.

정자를 지을 당시가 6월인데, 들보로 쓸 굵은 나무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 대 위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넘어졌고, 스님은 그 소나무로 들보를 만들어 육각형의 정자를 완성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이곳을 의상대로 불러 왔으나 이 때 정식으로 의상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1936년 폭풍으로 무너졌다가 이듬해 중건되었으며, 1974년에 강원도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고 1975년에도 한 차례 중건되었다.
근래는 1994년 11월 강원도에서 의상대를 점검한 결과 기둥·기와 등 구조체가 10도 가량 기울었고, 기둥이 썩는 흔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등 붕괴 위험이 있어 해체되었다가 1995년 8월에 육각정(六角亭)으로 복원되었다.
이곳은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 위에 있는데, 주위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관동 팔경'의 하나로 꼽히면서 시인 묵객이 즐겨 찾는 곳이었으며, 지금도 낙산사를 찾으면 반드시 들러 보는 곳이 되었다.












의상대 아래 절벽을 내려다보면....












의상대에서 바라본 홍련암쪽 바다.

안개때문에 홍련암, 해수관음상.. 모두 안보인다 ^^;;












홍련암을 향해 가는길에...












길가에 이런 꽃이 화사~하게 피어있더라...

( 꽃 이름은.. 모르겠다 -_-; )











홍련암 가는길 바닷가에 서 있는 ... 약수물을 졸졸졸 흘리는 석상.

저 석상을 보니 생각나는게
예전 Ex-Girlfriend 랑 낙산사 와서 이 앞에서 웃긴 사진 찍었던 기억이... .. 쿨럭쿨럭~











맑은 날도 좋지만
이런날씨도 참 분위기 있고 좋다.












홍련암 가는길...












점점더 멀어져가는 의상대...












드디어 저기 홍련암이 보인다.

역시 멋진곳은 절.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다는... 흠흠 ^^:



홍련암

낙산사의 산내암자의 홍련암(紅蓮庵)은 의상대 북쪽300m 지점에 있다. 이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본절인 낙산사를 창건하기 앞서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한 장소로서, 또한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석굴 안에서 기도하던 바로 그 장소로서 낙산사의 모태가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慶州)에서부터 멀리 이 곳까지 온 의상대사는 이곳에서 푸른 새〔靑鳥〕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가므로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했다. 이윽고 7일 후 바다 위에 붉은 연꽃, 곧 홍련이 솟아나더니 그 위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의상대사는 드디어 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홍련암이라고 이름 짓고, 푸른 새가 사라진 굴을 관음굴(觀音窟)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또다른 창건설화로서는,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자리에 대나무가 솟았는데, 그 곳에 불전(佛殿)을 지으니 곧 홍련암이라고도 전한다.

두 이야기 전부 의상대사가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올려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내용에서는 일치하며, 부분적으로 파랑새·대나무·석굴 등이 첨가된 것이므로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홍련암의 연혁은 주로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에 의거해 살펴볼 수 있다. 그 책에 따르면 의상대사의 창건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619년(광해군 11)에 중건되었고, 1752년(영조 28)에 덕린(德麟)스님이 중수했다. 이어서 1797년(정조 21)에 혜민(惠旻)스님 중건, 그리고 1869년(고종 6)에 의연(義演)스님이 중건했으며 1911년에 흥운(興雲)·청호(晴湖) 두 스님이 중수했다고 한다.
1869년의 중건은 1866년의 홍수로 무너졌기 때문이며, 1911년의 중수는 1908년(융희 2)에 절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연혁이 비교적 짧고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연혁이 거의 전하지 않는 점이 아쉽지만, 남겨진 기록을 통해서나마 그런대로 낙산사와 더불어 꾸준히 법등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당우로는 관음전과 요사가 있다.

전각이나 불상·불화등에서 오래된 것은 없으나 홍련암 전체가 현재 강원도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에는 동암 도봉(東庵道峰)스님이 1962년에 중건한 봉향각(奉香閣)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관음전 등은 1975년의 중창 때 지어졌으며, 안에 봉안된 탱화 역시 같은 해에 조성되었다.

관음전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인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서 바닷가 암석굴(巖石窟)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전각은 법당 가운데쯤에 조그맣게 마루를 뚫어 놓아 그곳으로 출렁이는 바닷물을 실감나게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특이하다. 절 근처 바닷가에는 보기 드문 석간수(石澗水)가 있는데, 이 샘은 원효스님이 양양에 있는 영혈사(靈穴寺) 샘물을 석장(錫杖)에 담아 끌어 왔다는 설화가 전한다. 이 샘물은 지금은 보타전 앞으로 옮겨져 있다.













아무도 없는 홍련암에 홀로 목탁을 두들기며 염불을 외우시는 스님.











홍련암 난간에서 내려다 보는 바다와...  바로 마주보이는 의상대.













헐.. . 이거 성차별 아닙니까 ㅎㅎ












돌아오는 길에...

오늘 이 연못을 몇번을 지나치는지 ^^;;;











연못옆의 식수대.

'맛있게 드세요'도.. '안심하고 드세요' 도... 아닌...

'예쁜 말만 하세요' 라는 좀 어리둥절한 글이 써있더라 ^^;;;;











이제 그만 돌아갈까... 하다가
'원통보전' 있는쪽도 마저 둘러보고 가야겠단 생각에 언덕을 올라오니...

아아... 아....

이곳은 몇해전 그 화재로 전소된 낙산사의 흔적이 아직도 저렇게 남아있더라...











한구석에는 복원된지 얼마되지 않은 티가 팍팍나는 종이 있다.
이번에 복원된 반질반질 새거라는 느낌의 낙산사 '동종' 이란다.

보물 제479호 이었지만.. 이젠 더이상 보물이 아니라는.... ..


그런데!! 알고보니

저 사진에 보이는 종은 이번에 복원된 동종이 아니라고 한다 -_-;;;
이 종루에는 종이 2개가 달려있는데
사진에 보이는 저 큰 종 뒷편으로 좀 더 작은 종이 하나 달려있어서
사진찍은 이자리에서는 안보이는.. 그 종이
예전엔 보물 479호였던 이번에 복원된 동종 이라고 한다 .. 헐~












전소되어 예전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주춧돌, 경계석을 설치하고
다시금 예전의 그모습을 복원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
.. ... 이었다가 오늘은 일요일이라 쉬는갑다 ㅎ












암튼. 아직 복원되지 않는 화재의 흔적들을 지나오면
완전하게 복원된 '원통보전'이  그 앞의 7층 석탑과 함께 말끔한 모습으로 서 있다.




원통보전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중심법당으로서 낙산사가 관음성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원통보전은 원통전(圓通殿), 혹은 관음전(觀音殿)으로도 불리며,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봉안한다.

지난 2005년 대형 산불로 소실된 낙산사 원통보전은 전쟁직후인 1953년, 당시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관음보살의 원력으로 치유하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관심과 군인들, 지역민들의 노력으로 복구된 것이었다.

「양주지밀기낙산사사적(襄州地密記洛山寺事跡)」에 따르면, 의상스님이 관음굴에서 관음대성을 친견하고 수정(水精)을 건네받은 뒤 관음의 계시로 흙으로 빚은 관음상을 관음전에 봉안하면서 낙산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관음전은 곧 원통보전의 다른 이름이므로 낙산사 창건부터 원통보전이 주된 금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이후 858년(헌안왕 2)에는 사굴산파의 개산조(開山祖)인 범일(梵日, 810∼889)스님이 이곳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그 모습을 상(像)으로 만들어 불전에 봉안했는데, 아마도 관음보살상과 함께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시대에 몽고군의 침략으로 관음상이 훼손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고려의 명유(名儒)인 이규보 등이 새롭게 관음상의 복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원통보전 내에는 건칠관세음보살상을 독존(獨尊)으로 봉안하였는데, 2003년 2월 3일 보물 제 1362호로 지정되었다. 후불탱화로 아미타극락회도가 걸렸으며 그밖에 관음상 주위로는 오른쪽에 신중탱화(1959년)와 동종(銅鐘), 사진본으로 된 의상대사 진영 등이 조성되었다.

2005년 4월 화마로 원통보전은 완전 소실되었으나, 주지 금곡 정념스님을 비롯한 대중들의 노력으로 건칠관세음보살상은 안전한 곳으로 봉안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칠층석탑

원통보전 앞에 세워진 조선시대 석탑으로서 현재 보물 제499호로 지정되어 있다.

낙산사는 조선 세조 대 (재위,1455∼1468)에 중창되었는데 이 탑도 그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비록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이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탑의 상륜(相輪)부분까지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불탑 연구에 훌륭한 자료가 된다.

탑의 양식을 살펴보면, 평면은 방형(方形)으로서 기단석 위에 탑신이 놓이고 그위에 상륜부가 마련된 구조를 하고 있다. 기단석(基壇石)은 지면에 2단의 층을 이룬 지복석(地覆石)과 그 위의 복련(伏蓮)이 조각된 지대석(地臺石)으로 구성되었다.

기단은 단층기단으로서 우주(隅柱)가 새겨지지 않았고, 그 위에 얹은 뚜껑돌인 갑석(甲石)은 아래 위가 수평인 하나의 돌로 된 판석(板石)인데, 그 밑에 부연(副椽)과 2단의 각형(角形) 고임이 있다. 기단 상면에는 겹잎〔複蓮〕의 복련(覆蓮) 24잎이 조각되었다.



이 탑은 전체적 양식은 강릉시 내곡동 403번지에 있는 보물 제87호 신복사(神福寺)터 삼층석탑과 비슷하다.
이 탑은 한국전쟁 당시 손상되었으나 1953년 4월 이형근 장군이 낙산사를 중건할 때 함께 재건되었다. 현재 탑의 크기는 전체 높이 620㎝이다.












참.. 근사하다.

저 안에 모셔져 있는 '건칠관세음보살좌상'과
건물 앞에 걸려있는 원통보전의 편액,
그리고 원통 보전을 둘러싼 담벼락 또한 이런 저런 사연을 많이 담고 있더라...










원통보전 안은 너무나도 엄숙한 분위기라 찰칵대고 사진찍기 뭐해서
몇십발자국 떨어진곳에서 한컷.

건물안에 운좋게 화재를 피해간 보물 1362호 건칠관세음보살좌상도 보인다.






건칠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1362호
낙산사건칠관음보살좌상(洛山寺乾漆觀音菩薩坐像)
보물지정일 2003.02.03

낙산사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건칠불상

금속으로 만든 8각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는데, 적당한 크기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고개만을 앞으로 약간 숙여 마치 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머리에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높은 보관을 썼으며, 네모꼴에 가까우면서도 각지지 않은 둥글고 탄력적인 얼굴에는 귀·눈·입·코 등이 단정하게 묘사되어 있다.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가슴 부분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가냘픈 듯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양 어깨를 덮은 옷은 옷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데, 내의 깃이 가슴 밑을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이 관음보살상은 표현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반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초기의 작품임을 짐작케 해준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좋고 특히 얼굴표정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고대 이래의 형식에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보관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원장

원통보전 주위에는 그 둘레를 네모 낳게 방형(方形)으로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담장인 원장(垣墻)이 있다.

축조된 시기는 세조가 절을 중건할 때 처음 쌓았다고 전한다. 이 원장은 법당을 둘러싼 성역(聖域) 공간임을 구분하면서 공간 조형물로서의 효과도 아울러 겸비하고 있다.

사찰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우리 나라의 대표적 담장이며, 현재 강원도유형문화재 제 34호로 지정되어 있다.

담장 안쪽의 담벽은 기와로 쌓고 담장 바깥쪽은 막돌로 쌓았다. 법당을 향한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단의 장대석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1단의 장대석 받침돌을 놓았다.
법당을 향한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단의 장대석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1단의 장대석 받침돌을 놓았다.

담벽은 강회진흙과 평와(平瓦)를 차례로 다져 쌓아 담벽앞면에 기와로 가로 세로의 줄을 맞추고, 일정한 간격에 맞추어 둥근 화강암을 바르게 쌓고 돌과 돌 사이는 강화진흙으로 메웠다. 담장 위는 기와로 지붕을 이어 담벽을 보호하고 있다.


본래 터만 남아 있었으나 근래에 전체적으로 보수하면서 연결했다. 크기는 전체 길이 220m, 높이 3.7m이다.
산불로 일부 유실되었으나 원통보전과 함께 복원될 예정이다.






비오는 와중에 한손엔 우산들고 한손엔 비닐봉지로 둘러싼 카메라 들고
구경하랴.. 사진찍으랴.. 이것저것 참견하랴.. ㅎ
나름 재미있게 낙산사 구경을 했다.









그리고 잠시 들렀다 간 방파제.
아까 해수관음상 있는곳에서 내려다 봤을때 보였던 그 방파제.

날씨만 좋으면 여기서 낚시대라도 좀 드리고 싶었는데
이거야 원..   파도가 나를 집어삼킬듯이 쳐대니 테라포트 위에 올라 갈 수도 없겠더라는 ^^;;;





암튼.

둘째날은 낙산사 구경하고
밤바다좀 걷고 확실하게 빈둥빈둥~

쉬러 와서
마냥 푹 쉬는것도
나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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