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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맛에 가보자고~ 중국 ! ( 이화원 , 진주 쇼핑) [11/26]

다녀온곳(국외)

by dunkin 2006. 3. 24.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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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이어서...






가다보니 이런 멋들어진 돌도 있고.... 그 위에 정자라니 크~

이런 돌 하나도 다 인력으로 끌고 와서 이화원에 갖다 놓은거라고 한다.

참... 권력은 산도 만들고 호수도 만들고 말한마디로 별의 별걸 다 해 낼수 있구나 ... 싶더라.













그냥 지나가다가...

아침의 차분한 햇살을 맞은 모습이 왠지 좋아보여 한컷.











건물 입구 양쪽에 있는 기.괴.한. 모습의 나무.

이화원에 심어져 있는 나무니 꽤나 특출난 타무일터.

이화원 뿐만이 아니라
북경을 다니다 보니 우리나라에선 보지 못한 형태의 나무들이 곳곳에 보이더라는...











자.. 또 코스를 따라 이동.

이동하는 곳곳

통로마다 저렇게 양쪽으로 근사한 나무들이 .....












하하.

참 사연이 많은 돌이라고 한다 ^^


일명 '패가석' 이라고 ...

이 돌을 발견한 넘이 욕심부려 집으로 돌을 옮기다 돈이 많이 들어 집안이 망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그런식으로 망한넘이 한두넘이 아니라고 .. ^^;;;

이 돌 사진 찍으니 가이드가 한다는 말이
거지돌은 뭣하러 찍냐며 어이없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걸 보니
미신같은것에 상당히 의미를 부여하는 이동네 사람들은 이 돌에 가까이 가기도 싫고, 만지기도 싫어하는듯.








대충 이런 사연의 돌.










아... 북경에도 봄이 다가오는구나.











이 어이없는 공사현장이 무엇이냐... ㅠㅠ

여기가 바로 '장랑


[장랑,長廊]
동쪽의 요월문에서 서쪽의 석장정까지 총 길이 728미터, 도합 273칸의 화랑으로 중국 회랑 건축 중 제일 크고 제일 길고 제일 명성이 높은 장랑이다.장랑의 채색화 제재는 꽃, 새, 나무, 돌, 산, 물, 인물 등 매우 광범위하다. 8세기 중엽 건륭 황제(기원1736-1796년 제위)가 궁정의 화가를 서호에 파견하여 사생하게 하였는데 546폭의 서호 경치를 그려 장랑의 273칸 화랑의 들보에 전부 옮겨 그렸다.금세기 60년대 중국정부는 서호풍경화를 보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특색을 지닌 채색화 1만 4천여폭을 더 그려 장랑을 제일의 화랑으로 되게 하였다.


중국화랑중 제일 크고 제일 길고 제일 명성이 높다지만...

공사중이더라는 ㅠㅠ


서태후처럼 이 장랑을 따라 호수의 풍경을 감상하며 거닐고 싶었건만...

이넘의 베이징 올림픽인지 뭔지 때문에 여러번 피 본다 ㅠㅠ













호수를 따라 죽~ 따라 가게 되어있는 운치있는 길....












이 문을 지나면 만수산에 지어진 '불향각'을 올라 갈 수 있으나...

지랄같은 북경 올림픽 덕에 지금 수리중이라고 입장을 제한 하더라는 ㅠㅠ

저 불향각에 올라서서 곤명호를 내려다 보면 아래서 보는것과는 비교도 되지않게 근사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고 하던데

짜증이 아니날 수 없다 !


이화원 구경을 안한듯한 기분마져 들더라는 ㅠㅠ










그냥.

힘쎄보여서 ^^;












살짝 얼은 곤명호의 얼음위에서 무언가 막대기로 열심히 얼음을 쑤셔대는 중국인.

대체 뭘 하는걸까.





여기까지만 슬쩍 돌아보고 이화원을 떠났다 -_-^


뭐..뭐란말인가..

이것이 페키지 관광의 한계인거지 뭐.

개인적으로 여름쯤에 왔다면 이화원 구경만 하루종일 했을듯. ( but 사람이 미친듯 많아 각오해야 한다고 하더라.. )






암튼 아쉬워서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보니 이화원을 잘~ 설명해 놓은 것이 있어서 퍼왔다.

사진 또한 이 겨울의 삭막한 풍경이 아니라서 마치 다른 동네 사진 같은 느낌이다 ㅠㅠ

혹. 중국을 가려는 사람! 겨울엔 가지마시라 !!



** 출처 : 박복주홈피에서 인용 편집


이화원의 이름은 원래 청하원이었다. 천안문 광장에서 북서쪽으로 약 15km 거리에 위치한, 중국 최대의 황실 정원이다. 北京 해정에 위치해있으며 중국에서 보존이 가장 잘 되어있는 고대 정원으로 3/4이 물이다. 석교와 궁전등 여러가지의 볼거리가 가득하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공 호수로 호수를 만든 흙으로 호수 중앙에 산을 만든 엄청난 규모의 정원이다.

 

건성으로 관광하다보면 별의미 없이 지나치기 쉬운 코스지만 사전에 정보을 가지고 관광을 한다면 중국이란 나라에 대하여 다시한번 역사속에서 느껴지는바와  도도히 흐르고 있는 중국인의 저력을 알수 있게한다.

 

북경의 서북쪽에 있는 가장 큰 공원. 물이 풍부한 곳이기 때문에 인공호수인 昆明湖로부터 공원의 구석구석까지 물을 끌어들여 경관을 높이고 있다. 전체 면적 290만 평방미터 가운데 인공 호수인 昆明湖가 4분의 3을 차지한다. 둘레 길이는 8km 정도이다.


이화원은 북경에서 가장 볼 만한 곳 가운데 하나이다. 한 바퀴 돌자면 거의 한나절이 걸린다. 계단 오르기가 다소 힘들더라도 萬水山에 올라 눈 아래 펼쳐지는 풍경을 감상라도록 하자. 밑에서 보는 것과는 완연히 다르다. 곤명호와 마찬가지로 만수산도 인공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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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의 한자표기는 和園. 중국 베이징시[北京市(북경시)] 서쪽 교외에 있는 공원. 총면적 2.9㎢. 원래 금나라 때 1153년 완안량(完顔亮)이 행궁(行宮)을 설치한 것이 시초이며, 원(元)나라 때 지금의 완서우산[萬壽山(만수산)]과 쿤밍호[昆明湖(곤명호)]를,명(明)나라 때 호산원(好山園)을 조성하였다.
시의 서북부 교외에 있는 큰 공원으로 청대에는 여름의 별궁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총 면적 267 ha 로 이중, 昆明湖라는 인공못이 3/4를 차지한다.
 
 북부의 인공산은 萬壽山이라고 한다. 주변은 모두 벽으로 쌓여 있다. 이화원은 金朝 1153년에 황제가 궁전을 조성한 것을 시초로 명나라때에 몇 채의 건물을 세워 好子園으로 개칭하였다.
 
 
 明나라 때는 호수 주변에 여러 개의 사원과 정자가 세워졌다. 淸나라 乾隆 황제(1711-1799)는 역대 어느 황제보다도황실 정원의 조성에 더 많은 힘을 기울여, 곤명호를 확장하고만수산에 여러 건물을 지었다. 그가 북경 서북쪽 교외에 조성한 이른 바 三山五園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날의 이화원이다.
 
 
청의 건륭제는 1750년 昆明湖를 확대하고 만수산에 각 건물을 세웠다.
청(淸)나라 때인 1764년에 개축, 청의원이라 불리다가 1888년 서태후(西太后)가 다시 개수하고 이허위안이라 개칭하였다

1860년 열불 연합군은 북경에 침입하여 삼산오원에 불을 지르고 보물을 약탈했다. 1888년 西太后는 해군 예산을 유용하여 크게 개축하는 한편 이름도 이화원으로 개칭했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해군을 총괄하던 光緖황제의 아버지 순친왕(醇親王)이 한편으로는 서태후의 비위를 맞추고, 한편으로는 아들이 실권을 가진 황제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해군 예산을 유용하여 은밀히 공사를 진행시켰다고 한다. 이것이 훗날 淸日전쟁에서 중국이 패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00년 이화원은 또 한번의 수난을 겪었다. 義和團사건을 빌미로 北京에 침입한 8개국 연합군이 문화재를 약탈하고 건축물을 대파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서태후가 西安으로 피신했다가 북경으로 돌아와서 중건한 것이다.
辛亥革命 후 원세 개(袁世凱)의 '황실 우대 조례'의 규정에 따라 이화원은 淸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사유재산이 되었다. 淸나라 황실은 1914년부터 입장료를 받고 이화원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1924년 부의가 황궁에서 쫓겨난 후 이화원은 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원래에는 淸朝의 '여름 離宮'의 일부여서 당시에는 舟明園, 萬春園, 長春園 등을 합하면 현재의 수배에 달하는 광대한 규모였으나 1860년의 제2차 아편전쟁(아로호 사건)에서 영.불 연합군에 의해 철저하게 약탈, 파괴된 뒤에 불에 타 없어졌다. 그 후에 이화원을 재건했지만 女帝인 西太后가 정부예산을 유용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한 것이 1884년의 일이다. 따라서 공원 내에는 서태후와 인연이 깊은 문물이 많이 남아 있다.                                                                                  

전체는 萬壽山과 곤명호로 이루어지는데 이들을 배경으로 누각, 전당과 소나무, 잣나무, 노목이 자아내는 풍경은 참으로 볼 만하다. 특히 눈에 덮인 광경은 절경이다.
 전형적인 중국풍 정원인 이화원. 곤명호와 만수산 언덕의 비경을 보듬어 안고 있는 청대의 별궁으로, 연꽃이 유난히 아름다워 서태후는 이 연못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東宮門으로 들어가 호수 연변을 따라서 화조, 풍월 등을 빽빽하게 그린 아름다운 긴 낭하를 거닐면서 경치를 즐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청조의 궁중요리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聽-館餐廳'이 있다. 예전에 서태후가 연극이나 음악을 즐긴 곳이기 때문에 황제의 의상을 빌려 입고 사진도 찍을 수 있다.


<돌로 만들어진 배인
청안방(淸晏舫)>


서태후는 이 곳 여름 별궁에 기거하면서 군함의 건조비를 유용하여 움직이지 않는 돌배를 만들었다. 청나라 말기 잇따른 외우내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궁전 양식의 대리석 석방에서 파티와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이화원은 북경시 서북 교외에 위치, 도심에서 약 19키로미터 거리로 청나라 때의 황실 원림과 행궁이었다. 이화원의 원명은 청의원이며 1764년에 건조되었다. 부지 290헥타르, 그 중 수면이 220헥타르이다. 원내는 궁정구, 전산 전호구, 후산 후호구 3개 경치구로 나뉜다. 전당, 누각, 정자가 도합 3,000여칸으로 황제와 황후가 정치 활동을 하며 휴식, 유람하던 곳이다.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1888년에 자희태후가 해군 경비 500만냥 배근을 유용하여 재건, 10년만에 완공, 이름을 '이화원'으로 고쳤다. 이화원은 북쪽은 만수산을 등지고 남쪽은 곤명호를 안고 있다. 불향각을 주체로 지형과 수면을 충분히 이용하여 가산의 조성으로부터 길의 주향, 전당. 누가의 배치로부터 다리의 조형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전통적 원림 조성 기예를 충분히 계승, 발양함으로써 상부 상조의 전체적인 원림 예술 효과를 나타내었다.

       


유람코스

이화원은 그 기능에 따라 크게 황제가 정사를 돌보던 정치활동 구역, 생활 거주 구역, 유람 구역 등 3구역으로 나뉜다. 東宮門으로 들어가 仁壽殿을 중심으로 한 정치활동 구역을 관람한 다음, 인수전 뒤 쪽에 있는 광서황제가 거주하던 玉瀾堂, 광서황후가 거주하던 의예관(宜藝館), 서태후가 가주하던 樂壽堂 등을 둘러 본다.
다음으로는 총 길이가 무려 728m에 이르는 長廊을 따라 호수 주위를 걸으며 주변의 풍물을 구경한다. 장랑은 그 자체로서도 이화원의 명물이며, 내부에 있는 그림도 좋은 구경거리이다. 인물, 산수, 꽃, 새 등을 그린 색채화가 8천여 점이나 된다고 한다. 인물화의 전거는 역사상의 고사, 전설, 소설, 신화 등 그 취재의 폭이 매우 당양하며, 내용은 상고시대부터 淸代에 이르기까지 5천여 년을 포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桃園三結義(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姜太公釣魚(났시하는 강태공), 武松打虎(호랑이를 때려잡는 무송) 등이 있다.
장랑의 중앙에 있는 排雲門으로 들어가 배운전을 보고 나서 만수산의 佛香閣에 올라 눈 아래 펼처지는 풍경을 감상한다. 이화원의 입장료가 2元인데 비해 불향각의 입장료는 10原으로 상당히 비싸다. 그러나 한번 올라가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만수산에서는 서쪽으로 하산하여 돌로 만들어진 배인 청안방(淸晏舫)을 본 다음 유람선을 타고 맞은 편의 南湖島에서 내린다. 文昌閣을 지나 서태후의 전용 극장이었던 德和園을 구경하던 이화원의 대부분을 본 셈이 된다.
 

[동궁문,東宮門]
이화원 정문이다. 문은 삼명이암의 무전식 건축으로, 중간 정문은 '어로'로 황제, 황후가 출입하고 양쪽 문은 왕공, 대신들이 출입하며 태감, 병졸들은 남북 양측 옆문으로 출입하였다. 편액의 '이화원' 세 글자는 광서 황제가 쓴 것이다. 운룡석에 구슬을 갖고 노는 두 마리의 용이 부조되어 있는데 용은 황실의 존엄의 상징이며 또한 유지와 칙령의 표징이다.

[인수전, 仁壽殿]
궁정구의 주요 건축물의 하나로서 원명은 근정저, 광서 연간에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 어지 정치를 베푸는 자는 장수한다는 뜻이다. 인수전은 청나라 말년 자희태후와 광서 황제가 정무를 보던 대전이며 또 한 중국 근대사상 변법유신 운동의 획책지의 하나이다.
1898년 광서 황제가 이 대전에서 개량과 두령 강유위를 소견하고 총리 각국 사무 아문장경상행주로 임명, 이로부터 유신 변법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봉건 보수세력의 반대로 '백일 유신'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낙수당,樂壽堂 ]
대형 사합원으로 자희태후의 침전이다. 대전은 붉은 기둥에 회색 지붕으로 조형이 특이하고 웅장 화려하다.
낙숙당의 중앙에 있는 방이 서태후가 기거하던 곳이다. 서태후가 하루 식사하는데 드는 비용이 은 60량에 달했다고 하는데, 은 60량이면 당시에 쌀 45가마 정도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요리사만도 84명이었으며, 그밖에 다과나 유제품 등을 만드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무려 120여 명이 서태후의 입맛을 시중(?)들었다고 한다. 

[대희루]
큰 정원 '덕화원'내에 건조, 현재 중국에서 보전되고 있는 최대의 고대 극장으로서 높이 21미터, 상,중,하 3층으로 나뉜다. 아래층 천정판 중심에 천창을 내어 위층 무대와 통하게 되어 있으며 중간층 무대는 권양기로 도구와 배경을 위 아래로 오르내릴 수 있게 교묘하게 설치하여 변화 무궁하다.

[자희태후(서태후)]
자희의 성은 엽혁나라,청나라 제7대 황제 함풍(1851년~ 1861년 재위)의 귀비로서 함풍이 죽은 후 '수렴청정'의 명의로 48년 동안이나 조정의 대권을 독점하였다. 1905년 네덜란드 화가 Hubert Vos가 초청에 의해 자희태후의 초상화를 그렸다.이해 그의 연세 70을 넘었다.화상은 현재 덕화원 내에 보전되어 있다.

[장랑,長廊]
동쪽의 요월문에서 서쪽의 석장정까지 총 길이 728미터, 도합 273칸의 화랑으로 중국 회랑 건축 중 제일 크고 제일 길고 제일 명성이 높은 장랑이다.장랑의 채색화 제재는 꽃, 새, 나무, 돌, 산, 물, 인물 등 매우 광범위하다. 8세기 중엽 건륭 황제(기원1736-1796년 제위)가 궁정의 화가를 서호에 파견하여 사생하게 하였는데 546폭의 서호 경치를 그려 장랑의 273칸 화랑의 들보에 전부 옮겨 그렸다.금세기 60년대 중국정부는 서호풍경화를 보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특색을 지닌 채색화 1만 4천여폭을 더 그려 장랑을 제일의 화랑으로 되게 하였다.

[불향각,佛香閣]


만수산 전산 비탈 21m 높이의 거색기반 위에 건축, 남쪽은 곤명호를 마주하고 북쪽은 지혜해불전을 등지며, 이 불향각을 중심으로 각 건축군이 매우 정연하고 대칭되게 양날개로 펼쳐지면서 서로 호응하여 마치 한마리의 박쥐모습을 하고 있다.1860년 불향각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그 후 원상태로 재건하였는데 이는 라마교의 건축물이다.

[청연방(석배)]
석방이라고도 한다. 1755년에 건조, 몸체는 거석을 조각하여 만들었다. 총길이 36m, 상하2층 선실이 있다. '물(백성)은 배(왕조)를 띄울수도 있고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뜻을 취하여 청왕조는 반석과 같이 튼튼하여 물이 전복시킬 수 없음을 비유하였다.

[17공교]
곤명호 동쪽 제방과 호심의 남호도를 연결하는 대형 석교로서 총길이 150m이다.교두와 난간 기둥에 도합544마리 돌사자가 조각되어 있는데 형태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아아....


이 글을 보니 정말로 반의 반의 반도 제대로 못본게 맞다 ㅠㅠ

어디가서 이화원 다녀왔단 말 하지 말아야겠다 ㅠㅠ













버스타고 이동하면서...

중국의 불자동차.












이화원의 담.

역시 이곳 담도 높다.

겁이 많은건지.. 경치를 나눠 보기 싫은 욕심인지...












북경 변두리, 그것도 출근시간이 끝나고 나니 상당히 한적하다.

마치.. 북한 시내를 찍어놓은 홍보 영상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이화원을 대충 돌아보고 서둘러 우리를 풀어놓은곳은..

바로 저가 패키지 관광에 필수 옵션인 쇼핑 !!



진주를 가공해서 이것저것 파는곳이라고 하더라는.

뭐.. 돈도 없고, 나랑은 상관없는 물건들이라 슬쩍 둘러보고만 왔지만

처음 겪는 일이라 나름 재미있기도 했었다 ㅋㅋ












입구를 들어서니 왠 아주머니 사진인지 그림인지....

이야길 들어보니 이 여인네가 바로 그 유명한 권력자 서태후라고 한다.

저렇게 생겼었구나... 웃.

저렇게 생긴 여자는 피해다녀야겠다 ㅋ



아. 저 손톱이 엄청나게 길어보이는 저것은 손가락에 끼는 은으로 된 장신구라고 하더라는...

밥에 독들었다 저걸로 찍어보고 밥을 먹었다고 하더군.












일행을 따라 우루루루 들어가니

민물 진주 ( 흔히들 말하는 밥풀 진주 ) 가 어떻게 생기며 어떤과정으로 채취하는지를 직접 보여준다.

민물에서 자라는 조개인데 20~50개 정도의 진주가 나온다고하며, 조개는.. 맛이 없다고 하네 ㅋ

이쁜것은 골라서 악세사리 만들고 못생긴것은 갈아서 로션같은걸로 만들어 판다고 한다.


이번 패키지여행중 쇼핑센터 가는곳 마다 모두 이런식으로 직업 작업하는것을 보여준다던지

어떤식으로 만들어 지는지 설명을 해주더라는...


귀 얇은 아주머니 아저씨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한가지 방법이겠지만

애시당초 돈도 없고 살마음도 없는 나에게는 이 설명시간들이 참 신기하고 재미있는 시간들이었다^^












칼로 대충 훑으니 무슨 벌래 알 같이 생긴 진주가 후두두둑 떨어지더라는.....

암튼.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고서 일행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는데....











진주 살돈은 없고 ㅋㅋㅋㅋ

점원과 일행들 다 올라가고나서

기념으로 진주 하나 챙겨가겠다고 쪼개놓은 조개 뒤적거리며 진주찾기 ㅋㅋㅋㅋㅋ

결국 몇개 띁어오긴 했다.


아 미쳐..

가난이 죄지 ^^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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