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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맛에 가보자고~ 중국 ! ( 태평양해저세계, 천안문광장 ) [13/26]

다녀온곳(국외)

by dunkin 2006. 3. 25.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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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이어서...








촌놈 여기까지 왔으니 ...

기념사진 V그리며 한장 찍어두고~

또 버스를 타고 이동.

밥 먹으러 간단다.

































버스타고 이동중에 본 특이하게 생긴 건물.

무슨 건축어쩌구 하는 권위있는 곳에서 1등 먹은 건물이라고 하더라...

뿌듯해 해면서 이야기 하는것이 중국인들의 맹목적인 자부심이 느껴지더군.












그냥 버스타고 지나가다가...

거리 풍경.












거리풍경...

참 팔자 좋아보인다 ^^

( 벼룩신문 같은거 보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을 일자리 찾고 있는중일지도 ... )














거리 풍경..











거리 풍경....

전봇대를 지하로 많이 옮긴 우리나라에 비해 정신없이 뻩어있는 전선들이 상당하더라는....











거리풍경.

불법주차 차량도.. 모터달린 자전거 타고 다니는 아저씨도 보인다 ^^

오른쪽에 보이는 가게는 미용실. 우리나라 이발소 뺑뺑이 간판 같은게 여긴 미용실에도 걸려있더군.

암튼...














미용실 앞의 간판을 보니.... 헉!!!

정말 싸다 !!!!

머리 감겨주고 45분 마사지 하는게 10元! 즉...  한화로 1,300원 !!

머리자르고 드라이 하고 씻겨주는게 2,600원 !!

화장받는게 7,800원 !!

신부화장도 25,000원이면 떡을 친다 !


싼맛에 머리나 자르고 가고 싶었으나...

허나. 길거리 다니는 중국사람들 머리 보고선... 곱게 마음을 접었다 ㅋㅋ













거리풍경...












점심먹은 식당...

한산해 보였던 거리풍경이랑은 달리

초.만.원













후딱 밥먹고 조금 일찍 나와서 길거리 구경좀 하다가

제과점이 보이길래 한번 들어가봤다.

이런저런 빵들은 그냥 한국이랑 별다를것 없었는데

케잌 !!!

이것 참 어이없더라는 ^^;;;;;;

허풍 쎈 중국사람 답게 케잌도 이런식으로 엄청 과장되게 만들어놓더라 ^^;;

왠지 어이없었다 ㅋ

( 그래도 한국돈으로 37,000원이나 하는 드럽게 비싼 케잌이다.  머리를 무려 스무번이나 자를수 있는 돈이다 ^^; )














밥을 먹고 또 이동한곳은 그 유명한 천안문 광장.

저기 보이는곳은 기차역.

우리나라로 치면 구 서울역 역사 같은곳이라고 한다.













북경은 어딜가도 공사중.

그넘의 올림픽이 뭔지... 참...


암튼. 이곳부터 시작해서 천안문 광장, 천안문 , 자금성 등등 죽~ 일열로 늘어서있다.












이곳이 바로 모주석 기념당.

가이드가 하는 말이.. 저곳에 모택동 시신이 방부처리 되어서 수정관에 뉘어져 있고 -_-;;;;;

참배드리러 오는 중국인들이 오전 오후로 줄을 2시간이상씩 서가면서 참배 드리고 간다고 한다.




정작 중국을 이만큼 먹고살게 개혁을 한 '백묘흑묘론' 으로 유명한 '등소평'은 위인 정도로 생각하지만

'모택동'은 중국인들에게 마음속에 '신'과 같은 등급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라고 한다.




마오쩌둥 [毛澤東]

 

자 룬즈[]. 후난성[] 샹탄현[] 사오산[] 출생.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8세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3세까지 《논어》와 《사서()》 등을 읽었다. 16세까지 아버지의 반대로 진학을 못하고 농사일을 도우며 틈틈이 책을 읽다가 1909년 둥산[]고등소학에 들어갔다. 그 뒤 창사[]의 샹샹[]중학으로 옮겼고, 동맹회 《민립보()》의 열렬한 독자가 되어 그 신문에 실린 반청론()이나 혁명론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하였다가 1912년 제대한 뒤 제1중학에 입학하였으며,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이나 외국유학을 하지 못한 그는 이 학교에서, 영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봉건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 양창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재학 중인 1917년, 거의가 제1사범학교 학생들로 구성되고 후난성 혁명 지식인들의 본영이 된 신민학회()를 조직하였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한 뒤 베이징[]으로 가서 후난 청년들의 외국유학을 도왔다. 그해 10월 마오쩌둥은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였고, 양창지의 소개로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의 조교로 일하면서 방청하였으며 철학회와 신문학연구회()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학생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다.

1919년 5·4운동 발발 후 후난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을 펴냈으나 곧 폐쇄당하고 베이징으로 도망쳤으며, 러시아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920년 상하이[]에서 천두슈[]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와 1924년까지 창사 제1사범학교의 부속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 교사가 되었다. 1922년 양창지의 딸 양룬후이[]와 결혼하였고, 그해 7월 상하이의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후난성 대표로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였다.

1924년 국공합작()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6년 장제스[]의 숙청으로 상하이에 갔다가 1927년 우한[]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중앙농민부장이 되었고 국공분열() 뒤 농홍군() 3,000명을 조직하여 징강산[]에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주더[]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공농홍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1931년 장시성[西] 루이진[]의 중화 소비에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그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34년 10월 루이진에서 산시성[西] 옌안[]까지의 1만 2,500km에 이르는 대서천(西)을 시작하였으며, 도중에 구이저우성[] 쭌이[]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시안사건[西]을 거쳐 국공합작에 성공하자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고, 홍군을 국민혁명 제8로군으로 개편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지구전론()》(1938) 《신단계론()》(1938) 《신민주주의론》(1940)을 발표하였는데, 마지막 것은 중국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1945년 4월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보고로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8월 충칭[]에서 장제스와 회담하여 화평건국의 제원칙에 합의하였으나 실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1946~1948년 내전을 벌여 승리하였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 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 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을 맺었다.

1957년 반우파() 투쟁과정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바로잡는 문제에 대하여》를 발표하였고, 1958년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이른바 3면홍기()운동을 폈다. 1959년 4월 국가주석을 사임하고 죽을 때까지 당주석으로만 있었다. 1964년 4월 《마오쩌둥어록[]》을 간행시켰고, 1965년 10월 이후에는 당내에서 완전 고립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였으며, 1960년 이후의 중소논쟁과 문화대혁명 기간을 통하여 ‘마오쩌둥사상’을 높이 내걸었다.

1968년 10월, 1959년부터 국가주석으로 있던 류샤오치[]를 실각시켰다. 1969년 마오쩌둥-린뱌오[]체제가 확립되는 듯하였으나, 1971년 9월 린뱌오는 반()마오쩌둥운동에 실패하여 죽었다. 1970년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대중반란이라고도 할 천안문사건()이 일어나 위대한 영웅 ·독재자 마오쩌둥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전생애를 살펴볼 때,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외세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한 중국민들의 굴욕감을 씻어주며,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그의 목표는 칭송할 만한 것이었으나, 2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다.




천안문 사건도 있고 욕도 많이 들어먹지만

중국인의 마음속엔 여전히 대단한 카리스마로 남아있는듯 하다.




전~에 이야기 했던 중국 여성들의 남자들과 꼭 같은 사회활동 기회 역시 이 모택동의 주장때문이라고...

'부녀능정 반변천 (婦女能頂半邊天)'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다'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는 여성들을 부엌에 가둬두고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전족으로 억눌렸던 여인들, 노예처럼 생활했던 여인들이 이한마디에 크게 고무되었고

이제는 남자들과 대등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할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는....


( 그래도 밥짓고 청소도 하고 집안일도 남자랑 같이 좀 하지... ^^;;; )











저~어기 그 유명한 천안문이 보인다.

이 넓은 도로를 건너면 바로 그 역사적 사건들이 수도없이 일어났던 천안문 광장.


헌데... 이 넓은 도로에 횡단보도가 하나 있는데... 신호등이 없다 -_-;;

게다가.. 사람이 건너가고 있으면 차들이 멈추어 주지도 않고 속도도 줄이지 않고 곡예하듯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더라는...


상당히 길 건너기 살벌하더군.











길 건너와서 본 '모택동 기념관'앞의 인파들.

중국사람들은 아직 입장하려면 한참 남았지만 두어시간 전 부터 와서 저렇게 줄을서서 기다린다고...


 모주석 기념당

천안문 광장의 남쪽에 있는 모택동주석 기념당은 1977년 9월에 지어졌다. 건축물은 대추색의 화강암으로 지어졌으며, 기념당은 북청,첨앙청과 남청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방부처리된 모택동의 시신이 첨앙청 내에 있는 수정관에 뉘어져 있고 주위에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진귀한 꽃들이 관을 두르고 있다. 북청 상층에는 모택동, 주은래 등의 개국원로의 혁명업적이 나열되어 있다.

-개방시간: 8:30-11:30(화요일-일요일) / 14:000-16:00(화요일-목요일) / 7,8월에는 오전에만 개방한다.
-주의사항: 모택동 주석의 시신이 있는 첨앙청에 들어갈 때는 카메라와 캠코더, 각종 음료는 들고 들어갈 수 없다.













모주석 기념당 우측을 보면 뭔가 웅장하고 거대한 건물이 압도하듯 버티고 있다.

바로 '중국 국가 박물관' 이라고 한다.

그다지 박물관 스럽지 않고.. 혁명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분위기지만.... 분명 박물관 이라 하더라 ^^;

웹서핑 하면서 다녀온 사람의 글을 찾아보니.... 내부는 별로 볼건 없더라는...


중국 국가 박물관

천안문광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중국 국가박물관은 2003년 2월28일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1959년에 세워진 중국 역사박물관과 1961년에 세워진 중국 혁명박물관이 합쳐져 만들어진 곳으로 건물높이 33미터, 길이 313미터, 너비 100미터의 웅장한 기세를 가졌다. 인민 대회당과 서로 마주보고있으며 지속적으로 개보수를 진행하고 있다.

-개방시간 : 08:30-16:30













짠~

눈앞에 펼쳐진 허허벌판 광장.

이 아무것도 없는 광장이 그 유명한 천안문 광장이다.

와 보기 전엔 실로 대단할거 같고 엄청난 포스가 느껴질것 같았지만....

실제로 보니 별거없다 -_-;


동시에 백만명이 모여 집회를 할수 있다고 하니... 그 백만명이 모여있을때 보면 정말 장관일거 같다는 생각은 든다만...

지금은 그냥 보도블럭 깔린 평평한 먼지낀 허허벌판일 뿐이더라는.... ^^;;



중국 민주화의 상징, 천안문광장(天安門廣場 : 티엔안먼꽝창)

북경 시내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천안문 광장은 중국사람들의 드넓은 기개를 대표하는 명소다.
천안문 광장은 원래 1651년에 설계되었다. 그러다가 1958년에 시멘트로 접합되고 네 배나 큰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전체 면적이 44만㎡이며, 동시에 백만명을 수용할 수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 중의 하나로 꼽힌다.

또한 여러개의 인상깊은 건축물들이 주변에 들어서 있다.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북쪽은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천안문, 동쪽은 중국 국가박물관, 서쪽은 인민 대회당, 그리고 남쪽에는 모택동 기념당이 있다. 광장의 중심에는 중국 인민영웅기념비가 서 있다. 천안문 광장은 옛부터 대규모 군중시위, 집회, 행렬, 경축 행사 등이 이어졌다.

천안문 광장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천안문 사태'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1989년 4월 중국 전총서기이자 개혁가였던 후야오방(胡耀邦)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이 운동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가 점차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확산이 되어 서로 손을 맞잡고 천안문 광장으로 점차 운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기를 느낀 당시 지도자였던 덩샤오핑(登小平)은 이들을 진압할 방법을 강구하던 끝에 결국은 같은 해 6월 4일 천안문 광장에 모여있던 학생과 시민들을 기관총 난사와 전차 동원 등의 무력을 이용해서 강제 진압함으로서 사건을 마무리시켰다. 이후부터 천안문 광장은 중국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천안문광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볼거리는 해가 뜨는 새벽에 거행되는 국기 게양식이다. 행진곡과 함께 군인들이 정렬하여 나타나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게양하는데, 이 의식에 걸리는 시간만 거의 30분 정도 소요된다. 국기 게양시간과 강하 시간은 매번 조금씩 다른데 그 이유는 넓은 중국 대륙에서 해가 뜨고 지는 자리와 천안문 광장의 지평선이 서로 일치할 때를 계산하여 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양식이 거행될 때에는 자전거를 타고 광장을 지나갈 수 없고 대신,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가는 것은 괜찮다. 해가 어슴프레 뜨는 새벽의 오묘한 기운 속에서 벌어지는 이 작지만 웅장한 의식은 외국 관광객들 뿐 아니라 북경을 방문한 타지역의 중국인들에게 북경에 오면 꼭 놓치지 말아야 할 필수 코스이다.


흠...

그러고보니 꼭 놓치지 말하야 할 필수코스... 국기 계양식도 못보고 지나갔군.!

도대체 가는곳마다 정작 중요한 볼거리는 일정에 맞추지 못하거나..  죄다 공사중 -_-^


패키지 여행.. 이대로 좋은거야? !!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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