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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세종대왕릉, 효종대왕릉 - 자전거 타고 들러본 유네스코세계유산

다녀온곳(국내)

by dunkin 2014. 6. 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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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고 국토 종주 여행을 다니던 중
여주 부근을 지나다가 눈에 띈 간판하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세종대왕릉'

무작정 자전거 타고 달리는것 보다는 볼거리 있으면 잠깐잠깐 들러보는것도 좋겠다.. 싶어서 잠시 시간을 내어 들러보았다.
(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 국토종주중 처음이자 마지막인 일탈 ^^; )


근데...

세종대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한것이
나중에 찾아보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기록 되어 있는항목은 세종대왕릉이 아니고 '조선 왕릉', 즉 조선시대 왕릉 전체를 통틀어 문화유산으로 지정된것이더라는...
그러니깐 서울, 경기 일대 모든 조선시대 왕릉은 전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하면 되는거다.

세계유산 조선왕릉 =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519년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했다. 그래서 42기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히 보존됐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http://whc.unesco.org/en/list/1319 )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이 지척에 있기에 표 하나만 구입하면 둘 다 구경 할 수 있음.

일단 가까이 있는 효종대왕릉 쪽을 먼저 들러보았다.

( 입장료는 몇백원 수준이었고, 매주 월요일 휴관)







대략 이런 형태....

차를 가지고 오면 보통 세종대왕릉만 보고 갈듯...






효종대왕릉 입구를 들어서니 멋들어진 느티나무가...






입구 지나자 마자 꽤나 고풍스러운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무려 보물 제 1532호 라고...

여주 효종 영릉재실 (麗州 孝宗 寧陵齋室)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대왕(1619~1659, 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며, 재실(齋室)은 제관(祭官)의 휴식, 제수장만 및 제기 보관 등의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다.


효종대왕릉은 1659년 경기도 양주군 건원릉(현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의 서쪽에 조성하고, 능호를 익릉(翼陵)이라 하였으며, 그 앞에 재실을 건립하였다. 이후 1763년 석물에 틈이 생겨 현 위치로 옮겨오면서 능호를 영릉으로 고치고 재실도 함께 옮겨왔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되어 원형이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영릉 재실은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고,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대표적인 조선시대 재실건축으로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보물 제 1532호









영릉재실을 둘러보던중 입이 떡 벌어지게 멋진 느티나무가... 

600년 세월을 버틴 느티나무






느티나무 그림이 참 멋있어서 돌아서서 또 한컷.


이곳 영릉재실에 천연기념물 459호 수령 300년짜리 회양목이 있다고 하던데
조금 자세히 둘러보았더라면 발견했을건데 아무 생각없이 구경하다보니 발견을 못하고 지나쳐버렸다.
뭔가 좀 아쉬운...

그도 그럴것이


<문화재청에서 퍼온 사진 : http://www.cha.go.kr >

이렇게 마당 한구석에 이렇게 작은 나무일줄이야.... ^^;;;






효종대왕릉 가는 길.

비포장의 한적한 숲길을 홀로 걸어가니 자전거 강행군으로 쌓인 피로가 다 날라가는듯...






홍살문 [홍전문(紅箭門)]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전문 홍문이라고도 한다. 화살의 모양의 살대는 법도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또한 능역의 들머리에는 홍살문이 서 있고 재관들이 찾아올때 절을 하는 판위가 조성되어 있다. 홍살문에 도착한 제관들은 판위에 절을하고 정자각에 이르는데 홍살문과 정자각을 연결하던 돌길을 참도 라고 하며 가운데 높은 길은 신도라고 불러 돌아가신 선왕의 혼령만이 신도로 출입 할 수 있었다.


가운데 높은길은 선왕의 혼령만이 출입 할 수 있다고.... 

저 글을 읽고나니 괜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ㅎ





정자각 뒤쪽에서 걸어온 길을 보며 한컷.

정자각(丁字閣)


제례 때 제물을 진설(차림)하고 제사를 드리던 집으로 위에서 보면 건물이 ‘T’자 모양을 하고 있어 한자의 ‘丁’자와 같다 해 정자각이라 부른다. 동쪽과 서쪽에 오르는 층계가 있는데 이는 원래 제례의식이 동입서출(동쪽으로 진입해 서쪽으로 내려옴)로 진행됨을 의미한다. 이 건물은 1673년 영릉 천장(무덤을 옮김) 때 함께 건립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자각 내부. 제상 뒤로 능이 보인다






지금도 때가 되면 제를 지내는듯.






마음이 삐뚤어서 그런지 사진마다 조금씩 기울어진것이 ^^;;;;





 

영릉비(寧陵碑)


영릉비(寧陵碑)는 본래 경기도 양주(지금의 구리시 동구릉)에 있던 효종대왕릉을 1673년(현종14)에 이곳으로 천장한 사실과 그 후(1674년) 인선왕후의 능을 앞쪽에 따로 모셨음을 기록한 석비로서 비각과 함께 그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왕릉이 합장릉인 점과는 달리 따로 모셨으며, 대왕의 능은 상단 좌측에 위치하며 인선왕후 능은 아래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릉 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게 되어있어 가까이에선 릉의 모습을 볼 수 없고, 이렇게 좀 떨어진 곳에 와서야 겨우 볼 수 있는 효종대왕릉.

세종대왕릉이 합장릉인것과는 달리 효종대왕(뒤), 인선왕후(앞)의 능이 따로 모셔져 있는것이 특징이라고... (사이가 안좋으셨나 ^^;)







효종대왕릉을 구경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세종대왕능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세종대왕의 업적과 인지도 때문인지 효종대왕릉에 비해 입구의 규모나 꾸밈 부터가 차이가 난다 ^^;


세종대왕은 릉 뿐만이 아니라 훈민정음도 유네스코 세계기로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음.







세종전 이라고 번듯한 전시실도 따로 있음.

효종대왕릉에 비해 규모 자체가 다르다 ㄷㄷ





세종대왕릉의 제실. 들어가 볼까 하다가... 밖에서 그냥 바라보는것 만으로 만족.

효종대왕릉의 제실은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맛이 있는 반면 세종대왕릉의 제실은 좀 삭막한 느낌이라 그런지 발길이 옮겨지질 않는다.

홍살문 밖, 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 제관이 머물며 제례를 준비하던 집이다.

국장후 탈상 때까지 대군 등 자손과 문무백관이 매년 제례에 참여하였는데 이 때 제례를 준비하던 곳이다.

이 제실은 영릉 안산(능 앞에 있는 산)인 북성산 동남쪽에 건립되어 있었으나 후에 없어진 것을 1970년 이곳에 복원하였다.






페인트 칠을 다시 하고 있는 훈민문.

여기서부터 세종대황릉 시작인듯.





비포장 숲길이었던 효종대왕릉에 비해 이곳 세종대왕릉의 길은... 말끔하긴 한데 정은 안간다 ^^;






근처 연못에는 잉어거 드글드글...






잉어먹이 자판기도 ㅎ





세종대왕릉 풍경.





홍살문 앞 금천교.

이 다리를 건너면 이승과는 다른 영역이라는... 무시무시한 다리 ㅎ

능 앞으로 흐르는 개울을 높이 일컬어 어구 또는 금천이라 하고, 여기에 놓인 다리를 금천교라 한다. 금천교는 주로 능역의 수계가 맞닿는 홍살문 앞에 설치한다.


금천교는 그 한쪽이 바깥쪽과 구별되는 특별한 영역, 즉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풍수지리설의 배산임수의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이에 따르면 물은 산으로부터 흘러온 땅의 기운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아 주는 역할을 한다.


이 금천교는 1930년대까지는 남아 있었으나 그 후 훼손돼 없어진 것을 발굴해 2008년 5월 복원한 것이다.







저~어기 세종대왕릉이 보인다.





세종대왕릉의 정자각.





수라간 

산릉제례때 제례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던 곳이다.
주초석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에 옛 모습을 찾아 복원하였다.





수라간 내부는 무척이나 형식적. 초라하기 그지없다 ^^;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것에 안내판이 붙어있길래...

정자각 뒤의 서쪽에 있는 사각형의 석함으로 제사가 끝난 뒤 철상(제사음식을 치움)하면서 축문을 여기에 태워 묻었다... 라고 하는군.






세종대왕릉은 다른 릉과는 달리 왕릉 코 앞까지 올라 가 볼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여지것 가본 왕릉중 이렇게 개방 해 놓은곳은 처음보는것 같다.





생각보다 많이 소박한 세종대왕릉.





밤에보면 지릴듯 ㅎ





무시무시한... ㄷㄷ






이 위에서 보는 풍경이 꽤 괜찮다.






아이들을 데리고 구경온 가족을이 몇몇 보였는데
'여기가 할아버지 무덤이야. 인사드려~' 라는것 보니 성씨가 대충 짐작이 간다 ㅎㅎ






왕릉을 지키는 석상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긴 처음.






세종대왕릉는 원래 헌릉(지금의 서울 내곡동) 서쪽 산줄기에 있었는데 예종 원년(1469)에 이곳으로 천장했으며, 왕비 소헌왕후가 합장돼 있다. 영릉비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약력, 그리고 영릉을 옮긴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영조21년(1745)에 세웠고, 비각도 이때 건조했다. 
비문에는 “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서헌왕후 부좌”라고 새겨 왕비가 대왕의 왼편에 묻혔음을 기록하고 있다.

 



수복방

제기를 보관하거나 수릉관(능을 지키는 관리) 또는 수복(청소하는 일을 맡아 보던 일종의 관노비)이 거처하던 곳이다.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발굴해 1977년 원형대로 복원했다.






수복방 앞에 기이하게 생긴 소나무가 있어서 한컷.

이게 한그루의 나무인지... 네그루의 나무인지 알 수가 없다.






세종대왕릉을 떠나기전 아쉬워서 한컷 더....





나가는 길에 들러본 세종전.

세종대왕의 업적을 한곳에 모은곳이라는데....

세종전은 세종대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1977년 건립한 유물전시관으로서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세종대왕의 어진(왕의 영정)과 한글 창제, 육진 개척, 대마도 정벌, 천문 관측, 금속활자의 제조 등 대왕의 일대 위업을 그린 그림을 전시하고 당시에 발명·사용한 과학기구 및 악기와 그때 간행된 서적을 함께 진열해 놓았다.

또 갑인자, 향약집성방, 고려사, 신주무원록,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운라, 산조가야금, 산조아쟁, 거문고, 어, 해금, 바라, 태평소, 지, 적, 약, 퉁소, 경상도지리지, 초사후어, 전한서, 자치통감강목,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용비어천가, 훈민정음, 훈민정음언해본, 주자소도, 서운관도, 왕자시절의 독서도, 세종대왕어진, 즉위도, 측우기도, 지음도, 집현전 학사도, 훈민정음 반포도, 편경, 특경, 건고, 특종, 편종 등은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의학·음악·문학의 대집대성을 입증하는 자료들이다.

이러한 자료들 가운데 ‘세종전’에서 손꼽고 있는 책으로는 자치통감강목, 초사후어, 전한서, 신주무원록, 향약집성방 등 5권을 들 수 있다.

 

 


보통사람에겐 여타 전시관들 처럼 재미가 없겠지만, 평소 이런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겐 신나는 장소일듯...





구포, 지자총통, 승자총통, 측우기, 대마도 정벌도, 이만주 정벌도, 육진개척도 등 국토 확장을 위해 힘쓴 세종의 과학 관련 병기






밖에서 볼때 꽤 큰 건물 같았는데 생각외로 전시실이 좁다.






전시실 밖으로 세종대왕의 발명품들이 전시되어있고, 직접 체험(?) 해 볼 수도 있음.





흔히 보던 해시계.

지금 시간이.. 음.... 음.. ..  이거 정확한거임?

앙부일구
앙부일구는 세종16년 (1434년)에 처음 만들어져서 조선말까지 사용되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던 해시계의 일종이다. 앙부일구란 시반의 모형이 솥을 받쳐 놓은 듯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그림자를 받는 면이 오목하다고 해서 일명 "오목해시계"라고도 한다. 영침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24절기와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 이 해시계는 보물 제845호 앙부일구를 본뜨고 오늘날 시제를 적용하여 제작한 것이다.





만원짜리 뒷면에 그려져있는 완전 익숙한 혼천의!

혼천의

현재 일만원권의 뒷장에 그려져 있는 혼천의는 국보 제230호 송이영의 혼천시계 중 혼천의 부분이다.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위치 등을 관측하는 기기로 조선 세종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회폐 뒷면에 그려져 있어서 익숙하긴 하다만
이것이 무엇을 하는 것이며, 어떻게 사용되는건지, 혼천시계의 일부분일뿐이라는것 등등...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좀 자세하게 알려줬으면 좋았으련만....





내 키보다 큰 거대한 기구가 있길길래...

간의(簡儀)
고도와 방위.낮과 밤의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인 천문관측기기이다. 새종대왕은 재위기간 중 천체를 관측하고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기위한 왕립 천문대인 강의대를 설치라고 많은 천문기구들을 만들에 하엿는데.세종 14년(1432) 먼저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목(木)간의를 실험제작하여 한양(서울)으 북극고도(위도)를 측정한 후 청동으로 간의를 제작하여 간의대 위에 설치하였다,원개 간의는1273년 중국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처음 만든 천문관측기기로서 오늘날의 천체망원경식으로 해.달.오행성과 별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하였다.






혼상(渾象)
세종19년(1437)경복궁내에 만든 혼상은 오늘날 천구의 와 같이 하늘의 별자리를 적도와 황도좌표의 각도로 둥근 구면 위에 표기하여 별자리의 위치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한 천문기기이다. 이 둥근 혼상을 회전시키는 축은 지구의 자전축인 북극(북극성 방향)고 남극 방향이 일치하도록 설치되어있다.따라서 혼상에 그려진 별자리도 시간에 따라 천체가 남중(자오선을 통과)할 때는 자오환(자오환)을 지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지평환 밑으로 지는 모습이 재현되어 하루 밤 동안 별들의 운행을 살펴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세종 때의 혼상은 현존하지 않지만 문헌 자료를 근거하여 야외에 전시할 목적으로 실제(지름 71.6CM)보다 크게 (지름 100CM)청동으로 재직하여 1464개의 별을 세겨 복원한 것이다)


두어시간 둘러본 효종대황릉, 세종대황릉.

여주를 지나 갈 일이 있다면 한두시간 시간내서 한번쯤 둘러봐도 후회는 없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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