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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국립중앙박물관... 공짜일때 가보자!

다녀온곳(국내)

by dunkin 2006. 1. 2.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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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새로 개관을 한

국립 중앙 박물관.




한번쯤 가야지..가야지...하다가 이제서야 가 봤다.

주말은 틀림없이 사람 버글댈테고.. 평일날 시간될때 한번 가봐야지.. 하다보니
이제서야 겨우...

허나. 평일이 사람이 없을거라는건 착각 ^^;;
느즈막히 갔는데도 불구하고 사람 많더만....


암튼.
올해는 입장료가 공짜라는 말에 해가 넘기기전에 겨우 가긴 했는데..
유료로 받아도 입장료 2000원 밖에 안하네 -_-;;;

그냥 아무때나 부담없이 가면 될듯.
( 3시간쯤 있었는데 주차비도 3000원이면 초 저렴 )



짧은시간에 많은걸 구경하고 싶어 대충 후다다닥 봐서 중요한 볼거리를 많이 놓친듯 해서 아쉽지만
시간내서 한번 가 볼만한듯 하다.






말도많던 중앙박물관 건물 외관.

한 나라를 대표한다는 박물관이 컨테이너 박스도 아니고.. 네모난 벽돌모양이 뭐냐!! 라면서 한동안 시끄럽더만..
실제보니 좀 아쉽긴 하다만
그렇게 피토하면서 욕을 할 만큼은 아니더만...
넓직 넓직한거는 맘에 들잖수.








왔으니.. 도장 찍고 ^^;;;

표..표정이 왜저러냐고 -_-;;;;










입장권 공짜로 받아들고 들어서니

꽤 넓직하니 좋더라는...

돈 들인 티가 팍팍 난다.

저게 다 내 세금이다 ㅠㅠ











중앙홀에서 고개를 처 드니... 

영화 '맨인블랙' 에서 처럼 .. 다급하면 저거 타고 우주로 날라가는건감 ^^;;;










평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벽돌같은 건물안데 가운데 이렇게 죽~ 길게 통로가 있고
양쪽으로 전시실이 1,2,3층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음.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 전시물이라 할수 있는.. 경천사 10층 석탑.

10년간의 이전.복원작업이 완료되어 일반에게 공개된 것이라고 하는군.




아래는 궁금해서 인터넷에서 찾아본 경천사 10층 석탑 이야기...



국보 제 86호 경천사 10층 석탑(높이 13.5m).

외세의 입김으로 지었다가 외세의 발굽에 부서진 탑. 경천사 10층 석탑의 수난은 영원히 끝난 걸까. 지난 9일 서울 용산 새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동 실내 동쪽 끝 역사의 길 공간에서 이 탑은 무려 10년간의 보수·복원 공정을 마치고 불상 가득 새겨진 다포식 지붕과 돌출 기둥의 우아한 자태를 다시 드러냈다. 높이 13.5m의 탑을 둘러싼 장막을 걷어낸 복원 기념 행사장에서 문화재 동네 사람들은 착잡함 섞인 표정으로 탑을 지켜보았다.
몽골(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고려 충목왕 4년인 1348년 경기도 개풍군 부소산 자락에 지어진 경천사 탑의 조성 계기는 개운치 않다. 고려를 짓누른 친 원나라파 세도가들의 발원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시주자인 강융과 원사 고룡봉, 대화주인 스님 성공, 육이 등이 1층 탑 몸체에 새긴 명문 내용이 남아있다. “대화엄 경천사에서 원나라 황제와 태자 전하의 만만세, 황후 폐하의 천추만세 등을 축원합니다. 또 비가 순하게 내리고, 부처님의 태양은 더욱 빛을 발하고, 법륜이 항상 전하기를 축원합니다… 지정 팔년 무자년 삼월…”

경천사탑은 기실 당시 원나라 황제인 순제 일족과 빌붙은 고려 아첨배들의 만수무강을 기리려 한 탑인 것이다. <고려사 열전>을 보면 발원자인 대시주 강융은 진주 출신으로 딸이 원나라 재상 탈탈의 소실이 되자 진녕부원군 존칭까지 얻으면서 한껏 세도를 부렸다. 또 고룡봉은 원에서 벼슬살이한 경력을 업고 돌아와 갖은 권세를 부리다 공민왕 때 잡혀 죽었다고 나와 있다(<고려사>는 둘을 역적으로 기록했다). 고려인 출신으로 순제의 후비가 된 기황후의 원찰이었다는 속설도 있다. 하지만 경천사가 몽골 지배 이전부터 왕이 자주 행차했던 왕찰인데다, 당대 세도가들이 발원한 것이었으니 탑 자체는 당대 최고의 건축, 공예기술이 집약되었다. 기단부와 3층까지 사면이 튀어나온 몸체에 목조건축의 기와지붕과 현장법사의 서유기 장면들, 설법 장면, 나한상 등을 새김하고, 5~10층까지 생생한 여래상 조각을 돋을 새김한 탑은 사방팔방으로 팔작지붕이 날렵하게 뻗어가는 복잡한 아(亞)자형 평면에 안정감과 정교한 조각기술이 어우러진 불가사의한 예술적 결정체였다. 원 장인들을 동원했다는 세간의 속설과 당대 자형 기단 평면을 불탑에 썼던 원나라 라마 불교 백탑 양식으로 미뤄 중국양식을 모방했다는 게 이전 통설이었다. 하지만 최근 신라 석탑에서 꽃핀 옛 장인의 독창적 디자인 감각이 다시 솟구친 걸작이란 평가가 적지않다. 기단 뿐 아니라 탑 몸체까지 사방으로 튀어나온 기둥과 복잡한 기와형 장식을 쓴 경우는 중국에 예가 없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탑의 부조상을 일컬어 “인물은 놀랍도록 살아있는 듯하며 형용이 또렷하며 정교함이 천하에 둘도 없다”고 극찬하고 있기도 하다.

탑은 조선 왕실과도 인연을 맺는다. 태조 이성계가 경천사를 신덕왕후 강씨의 처소로 삼아 드나들었기 때문인데, 훗날 강씨의 영정이 이 절에 봉안되어 세종과 세조도 출입했다고 전한다. 소재구 국립 고궁박물관 관장은 “저 유명한 서울 원각사터 백탑이 경천사 탑을 빼어닮은 것도 기실 경천사의 사적들을 최고의 불교 사적으로 받아들이고 재활용하려했던 왕실의 의지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후 경천사가 허물어지면서 홀로 산 자락에 남아있던 석탑의 가치에 눈독 들인 것은 구한말 일본인들이었다. 일찍이 1902년 이곳의 고적을 답사하고 보고서를 남긴 미술건축사가 세키노 다다시는 <조선미술사>에서 “고려 탑파 중 가장 변화가 풍부하고 세련된 기교를 자랑한다… 이런 종류의 건축은 중국에도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호평을 들은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는 1906년 고종 황제 하사품이라고 강변하면서 총칼을 들고 주민들을 위협해 탑을 해체하고 도쿄로 가져가버린다. <한국문화재 수난사>의 지은이 이구열씨의 말대로 임금님을 판 치밀한 문화재 약탈작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기단부에서 3층부분까지만도 각 층 몸체가 20여 조각이나 되는 석탑은 운송과정에서 크게 훼손되고 복원조차 못한 채 일본 땅에 10년 이상 처박혔다. 18년 하세가와 조선 총독의 노력으로 다시 조선땅에 돌아왔지만 역시 복원은 엄두조차 못낸 채 60년까지 경복궁 회랑에 방치되었다. 60년 걸출한 복원 전문가 임천의 노력으로 우뚝 섰지만, 대체한 쇠부재가 녹이 슬고 미숙한 복원기술로 곳곳에 틈이 생겨 결국 95년 재해체하고 10년간의 대수술을 받은 것이다. 국립 문화재 연구소 김사덕 연구관은 “단지 부재 사이가 1mm만 어긋나도 전체를 쌓을 수 없어 5~6년간 조립 실험을 하느라 숱한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한다. 현대 기술로 복원 조립하는 데만 10년 걸린 탑을 선조들은 도대체 어떻게 깎아서 쌓았을까.

멀더가 나서서 해결해줘야 할듯.. ^^;









큰 의미도 있었겠지만 비주얼적 측면에서 큰 효과를 보려고 세운듯.

민밋한 벽들사이에 높은 탑이 떡 하니 있으니 보기는 좋다.
목적은 달성한거 같군.










2층에 올라가서 본
경천사 10층 석탑과 박물관 풍경.

마치 찌라시 신문에 실리는 사진 같구려 ^^;










그냥 되는대로 사진 찍고.. 구경하고...










증명사진 풍 부처님상 ^^;;


























사진찍은것들중
뭔가 설명이 있는것들은 옮겨다 적었다...


아미타불(甘山寺 阿彌陀佛 立像)

720년 전후. 국보 82호.
이 불상은 명문에 의하면, 개원開元 7년[719년(성덕왕 18년)] 왕의 기밀 사무를 취급하던 최고 행정기구인 집사성執事省의 시랑을 지내던 김지성金志成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하여 미륵상 1구와 아미타상 1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미륵상은 어머니를 위해 만들었고, 아미타상은 처음에는 김지성의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었으나, 만드는 도중에 김지성이 죽자 그의 명복도 함께 빌기 위해 만들어졌다.
특히 아미타불 입상의 옷을 입는 표현 기법은 인도 굽타 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로 보아 통일신라 문화가 중국, 일본은 물론 더 나아가서는 인도와도 교류했었음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저렇게 손이 잘려나간 불상들이 꽤 된다...

왜 손을 잘라갔을까? 응?

허나 어디에도 그 이유를 설명해놓은 곳은 없더군.











내가 아는 어떤 누군가와 닮아서....

그..그녀석은 부처였단 말인가! -_-a












불상들 손을 잘 보면 각기 다른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설명이 있어서...

아.. 다 저런 저런 뜻이 있었구나....


이 설명 본 이후로 불상들 손 모양이 무지 신경 쓰이더라는 ^^;;;












아미타 구품인 손모양 !!! ㅋ












손.손.손....











나 오늘 한가해요~~ 자세 같은....


관음보살(金銅 觀音菩薩 坐像)

고려 14세기.
갸름한 얼굴과 몸체에 전체적으로 화려한 장식을 한 윤왕좌(輪王坐) 관음보살상이다. 윤왕좌는 가부좌한 자세에서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오른팔을 자연스럽게 올려놓은 뒤 왼손으로 바닥을 짚는 안정된 자세를 말한다. 주로 관음보살이 취하는 앉음새이다. 윤왕좌의 관음보살상은 중국의 송, 원대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에 나타난다.
이 보살상은 전체적인 조형과 장식적인 표현 방법에서 라마 불상의 요소가 두드러지는 작품으로, 윤왕좌의 특이한 자세를 유기적인 신체 비례를 통해 무리 없이 소화한 조각가의 감각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조명탓인지 불상들이 죄다 근사해 보이더라는....


보살(銅板 菩薩 坐像)

통일신라 7세기 후반.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10점의 판불 가운데 8점이 보살좌상인데 이것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 판불들은 10점 모두 밀랍을 이용하여 주조한 것으로 일본이나 중국에서 7-8세기에 걸쳐 많이 만들어진 압출불(壓出佛: 일정한 틀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판불)과는 다르다. 특히 이들 판불에는 아래쪽에 용도를 알 수 없는 꽂이가 두 개씩 달려 있다.
얼굴은 전반적으로 온화하며,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에는 목걸이, 팔찌, 구슬 장식 등으로 치장하고 양손은 가슴에서 합장하여 연꽃모양의 대좌 위에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다. 천의는 팔에서 감기어 다시 어깨 위로 부풀어 오르며 상승감을 나타낸다. 광배는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안에는 당초무늬와 연속된 구슬무늬를 뚫어새겨 화려하게 표현하였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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